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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무심한에메랄드99 작성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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신청인 주요 진술 내용연번사건 번호 (2다-)신청인 (출생연도)진실규명 대상자 (한자명, 출생연도,관계)진술일 진술장소・진술형태목격 전문주요 진술1143-5이○우 (1948)이○상 (李○相, 1922,아버지)2022.5.17.진실화해위원 회 조사3실・진술조서전문 (삼촌 이규상, 이△상 등 가족, 이○○ 등 마을 주민)•진실규명대상자 아버지 이○상(경남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)은 농업에 종사하였음.- 이○상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지식인 취급을 받아 어린이들을 야학에서 가르쳤음.•1948년 봄경 신안지서에서 정순경이라는 사람이 집에 와서 이○상을 찾았고, 이○상은 귀가한 후 근처에서 기다리던 정순경을 찾아갔다가 연행되었음.- 산청경찰서에 연행되어 총살된 어떤 사람의 소지품에서 이○상의 이름이 나와 이○상이 연행된 것이라고 마을 어른들이 이야기하곤 했음.•할아버지가 이○상을 면회하기 위해 산청경찰서와 남원교도소(*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으로 판단됨)에 갔 으며, 이○상이 전주형무소로 이감된 후에도 할아버지가 3차례 이상 면회를 다녀왔음.•한국전쟁 발발 전 할아버지가 마지막 면회를 다녀와서 이○상이 2주 후에 출소 예정이라며 기뻐하였음.•한국전쟁 발발 후 이○상의 소식이 끊기자 할아버지가 전주형무소로 찾아가 재소자들이 1950년 7월경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, 이○상의 시신은 못 찾았음.•할아버지는 전주형무소의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듣고 이○상의 제삿날을 음력 5월 27일(양력 1950년 7월 12일)로 정하였음.•제적등본에 이○상이 1954년 6월 29일에 본적지에서 사망했다고 기재되어 있으나, 사망신고 내용에 대 해서는 잘 모르며, 전주형무소에서 희생되었다고 하면 불이익을 당할까 봐 본적지에서 사망했다고 신고한 것 같음.•이○상이 희생된 후 할아버지는 화병으로 1956년 1월경 돌아가셨고, 지리산에 빨치산이 유명하니 희생자 가족들은 “빨갱이 가족”이라고 눈치와 괄시를 받 았으며, 신청인은 1967년경 세무공무원 필기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면접에서 연좌제로 떨어졌고 이후 공직 진출과 은행 취업을 포기하고 일반 기업에 취직했음.•참고인으로 삼촌 이규상과 이홍상, 이○○이 있음.2708김○용 (1945)김○성 (金○成, 1923,아버지)2025.3.5.무장면 행정복지센터 2층 회의실 (전북 고창군 무장면)・진술조서목격 (연행), 전문 (할머니 박금옥,어머니 조인순 등 가족)•진실규명대상자 아버지 김○성(전북 고창군 무장면 옥산리 죽림마을)은 농업에 종사하였음.- 김○성은 호적상 1923년생인데, 개띠여서 실제 1922년생이었던 것 같음.- 김○성은 석곡국민학교와 무장국민학교를 나왔음.- 김○성의 아명은 ‘○기’였음.- 김○성이 살아 있을 때 가족들의 경제적 형편은 괜찮았음.- 김○성은 부락에서 신망이 있는 사람이었음.- 마을에서 좀 떨어진 산속에 빨치산이 있었음.- 다른 마을에 살던 김○성의 지인이 빨치산 밑에서일을 하며 김○성을 포섭하려 했는데, 김○성은연번사건 번호 (2다-)신청인 (출생연도)진실규명 대상자 (한자명, 출생연도,관계)진술일 진술장소・진술형태목격 전문주요 진술 단체에 가입하지 않았고 대신 빨치산들에게 물을 몇 번 떠다 주었음.•신청인이 5살 때쯤 음력 10월 10일 또는 11일(양력1949년 11월 29일 또는 11월 30일경) 서리가 하얗게 내린 새벽에 총 든 군경 두 명이 집에 와서 김○성을 연행해 가는 걸 신청인이 직접 목격하였음.- 당시 신청인은 어머니 조인순의 손을 잡고 있었고, 조인순과 할머니 박금옥과 함께 김○성의 연행을 목격하였음.- 김○성은 빨치산에게 물을 떠다 준 혐의를 받아 연행된 것 같음.•김○성이 연행되고 몇 달간 소식이 없다가, 이후 김○성이 군산 또는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았음.•박금옥이 군산 또는 전주형무소에 가서 김○성을 면회하였음.- 박금옥은 면회를 다녀와 눈물을 흘리며 고심하였음.•김○성은 군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전주형무소로 이감되었음.•한국전쟁 발발 후 김○성이 귀가하지 않아서, 가족들은 김○성이 전주형무소에서 집단희생된 것으로 여겼음.•김○성의 시신은 찾지 못했음.•김○성의 제사는 집에서 연행된 음력 10월 11일(양력 1949년 11월 30일)에 지냈음.•제적등본에 김○성은 ‘1951. 2. 5. 본적지에서 사망’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, 숙부가 신고한 것이고, 내용이 왜 잘못되었는지는 모름.•신청인은 무장면 덕림초등학교를 나왔음.•김○성의 사후 조인순이 장사를 하며 가족들을 부양 하느라 많이 고생하였고, 신청인도 중학교에 갈 수 없었음.32104안○순 (1941)안○ [安○, 이명 안○현 (安○炫), 1922,아버지]2022.11.7.신청인 자택 (전북 군산시 나운동)・진술조서전문 (할아버지 안용식, 어머니 최귀례 등 가족,마을 주민들)•진실규명대상자 아버지 안○(전북 김제군 백산면 하정리, 불로동)은 농업에 종사하였음.•안○은 관헌에 잡혀갔다 나온 적이 있다고 주변으로부터 들었고, 나중에 안○이 1947년에 재판을 받아 1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기록을 찾았음.•안○은 1949년 칠월 칠석날에 동네 사람들과 술잔치를 하다가 동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김제경찰서 경관에게 연행되었음.•안○은 친구들과 함께 정부의 시책에 항의하는 데모를 했다가 누군가에게 ‘밀대’(밀고) 당해서 연행되었음.•할아버지와 어머니가 김제경찰서로 안○의 면회를 하러 갔다가 할아버지도 ‘아는 걸 말하라.’라며 경찰들에게 구타와 심문을 당했음.- 할아버지가 구타당할 정도였으면 안○도 구타당했을 것 같음.- 큰 작은아버지 안신호도 백산지서로 끌려가서 골병이 들 정도로 많이 맞았음.•안○이 연행된 후 한동안 소식이 가족에게 전달되지 않았음.•이후 안○은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음.연번사건 번호 (2다-)신청인 (출생연도)진실규명 대상자 (한자명, 출생연도,관계)진술일 진술장소・진술형태목격 전문주요 진술 •가족들은 김제경찰서에서 할아버지가 구타당한 후 전주교도소에까지 안○을 면회하러 갈 엄두를 내지 못 했음.•나중에 안○의 또래들이 ‘안○은 소 한 마리 값이면 안 죽었다’라고 이야기하며 당시 잡혀간 사람들은 경찰서에 소 한 마리 값을 갖다주면 풀려났다고 이야기 하였음.•한국전쟁 발발 후 전주형무소 재소자들이 다 죽었다는 사실을 가족들이 알게 되었음.•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안○의 시신을 찾기 위해 전주의 한 산골짜기에 갔는데, 시신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그 조차 기름이 부어진 채 타 있어서 안○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음.•제적등본에 안○은 1951년 3월 2일에 본적지에서 사망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, 할아버지가 안○의 사망신고를 면사무소에 맡겨서 잘못 신고된 것 같음.•참고인으로 고향에 거주하는 작은아버지 안□□와 안△△가 있음.•작은아버지들은 전후에도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, 신청인도 주변으로부터 “빨갱이 자식놈”이라는 모욕받았으며, 신청인의 해군 입대와 관련하여, 종조부가 신원조회 관련 조사를 받았음. 그래서 신청인은 관공서 진출 등은 꿈도 꾸지 못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음.42441하○수 (1947)하○남 (夏○男, 1927,아버지)2022.4.7.진실화해 위원회 1조사실・진술조서전문 (어머니양○남, 사촌 형 하○○, 6촌 양○호 등 가족, 양병록등 마을 주민)•진실규명대상자 아버지 하○남(전북 순창군 팔덕면 장안리 옥정마을)은 팔덕국민학교 선생이었음.- 하○남은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했음.- 하○남은 옆 마을의 김 씨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음.•하○남은 좌익사상을 가지고 활동하다가, 혼란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교직을 그만두고 1948년 봄에 어머니(하○남의 처)의 사촌 오빠 양○규의 집으로 피신하였음.•1948년 7월 초순경 새벽에 형사들이 집을 에워싸고 하○남과 양○규를 경찰서로 연행하였음.•하○남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은 다음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음.•전주형무소에는 양○규와 양○수도 수감되어 있어서, 어머니가 양○규 및 양○수의 처와 함께 여러 차례 전주형무소로 면회를 가 하○남을 보았음.•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하○남을 포함한 전주형무소 재소자들이 모두 군인들에게 총살되었음.•당시 가족들은 하○남이 총살된 장소도 몰랐고, 가족들에게 미칠 피해도 우려해서, 하○남의 희생에 대해 자세히 묻거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불가능했음.•제적등본에 하○남은 1957년 9월 7일에 사망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, 그 경위는 잘 모르고, 실제 사망일자와 다름.•하○남의 희생 이후 어머니와 외가에서 힘들게 살면서 하○남의 제사를 지내지 못 했음.•신청인이 1973년에서 1979년경까지 군산에 살 때 1년에 두 차례 정보과 형사들이 집에 찾아와 가족의 동태를 물었고, 신청인은 신원조회로 인한 추가 피해 를 우려해서 회사에서 해외연수를 신청하지 않았음.•참고인으로 양○호와 사촌형 하○○가 있음.연번사건 번호 (2다-)신청인 (출생연도)진실규명 대상자 (한자명, 출생연도,관계)진술일 진술장소・진술형태목격 전문주요 진술 2024.6.12.진실화해 위원회 조사1실・진술조서전문 (어머니 양○남 등 가족, 마을 주민)•진실규명대상자 양○수(전북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) 는 참고인의 이웃이자 외가의 먼 친척이며 같은 주서동(주소동)에 거주하며 참고인의 집과 400m도 안 되는 곳에 살았음.- 양○수는 처자식을 둔 어른이었고, 씨름을 잘했음.- 마을엔 양 씨가 많고 서로 씨족 관계여서 단합이 잘 되었음.- 마을에선 양○호의 삼촌이자 양○규의 동생이 전라북도 출신의 성공한 재일교포로서 유명했음.- 양○수는 동네에서 정미소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음.•양○수는 한국전쟁 몇 년 전에 경찰에 연행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음.- 양○수가 연행된 이유는 모름.•당시 참고인의 아버지 하○남도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참고인의 어머니와 양○수의 처가 함께 전주형무소로 면회를 다녔음.•양○수와 하○남은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희생되었음.- 하○남과 함께 연행되었던 양○규도 한국전쟁 때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희생되었음.- 정부에서는 전주형무소 재소자들이 북한 편을 들 것을 우려했다는 소문이 돌았음.•양○수와 하○남의 시신은 찾을 수 없고, 두 명 다 산소가 없음.•족보에 하○남은 1950년 7월 15일에 사망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, 양○수와 양○규도 비슷한 날짜에 희생되었을 것 같음.•참고인의 가족은 신원조회를 많이 당했음.54813최○규 (1950)최○래 [崔○徠, 1928,이명 최○곤 (崔○坤), 농업]2022.8.10.고창군청 2층 상황실・진술조서전문 (할아버지 최강식, 할머니 오연기, 어머니 남금순 등 가족, 남궁○○ 등 마을 주민)•진실규명대상자 아버지 최○래는 전북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출신으로 결혼한 뒤 가족들과 함께 처가가 있는 전북 정읍군 고부면 강고리 종암마을에 살며 농사를 지었음.- 최○래는 마을에서 ‘최○곤’이라고 불렸음.- 할아버지 최강식은 논이 많았고, 큰아버지 최○○ (이명 최△△)은 일본을 오가며 돈을 벌었음.•최○래는 1949년 봄에 소를 끌고 논을 갈다가 연행되었음.- 당시 친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두 명이 집에 와서 할머니와 숙모들에게 밥을 얻어먹고는 집 마당에서 총을 쏘자 어디선가 사람 10여 명이 달려나왔고, 밥을 얻어먹은 사람 두 명은 ‘최○래가 논을 갈고 있으니 잡아오라.’라고 했고, 할머니가 ‘너희들은 조카라면서 왜 내 아들을 잡아가느냐.’ 라고 항의하니 ‘이 할망구야, 내가 어째서 너의 조카냐.’라며 할머니의 배를 걷어찼음.•최○래는 정읍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정읍지청으로 송치된 뒤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음.•1950년 3~4월경에 할아버지가 전주형무소에서 최○ 래를 면회하였음.- 최○래는 할아버지에게 ‘늦어도 1950년 8월에는 출소하니 더 면회하러 오지 마시라.’라고 이야기하였음.- 최○○이 최○래를 석방시키기 위해 수소문하다가연번사건 번호 (2다-)신청인 (출생연도)진실규명 대상자 (한자명, 출생연도,관계)진술일 진술장소・진술형태목격 전문주요 진술 행방불명되었음.•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발발 후 전주형무소 재소자들이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마을 사람들에게 듣고 1950년 7월경 전주형무소로 최○래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지 만 최○래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음.- 전주형무소 희생지에는 시신이 100여 구씩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고, 피가 철철 흐르고 있어, 최○래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음.•제적등본에 최○래는 1962년 10월 10일 사망했다 고 기재되어 있는데, 신청인이 최○래의 시신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신고한 것 같음.•최○래의 사후 신청인은 호적에 5촌 당숙 최병일의 자식인 것처럼 기재되었고, 신청인이 군 복무 중 해외 파병을 가려고 하니 경찰이 집에 나와 조사를 한 사실이 있음.•참고인으로 최○래의 연행을 목격한 남궁○○과, 서울에 거주하는 사촌누나 최△△가 있음.611879최○옥 (1948)최○호 (崔○鎬, 1908,아버지)2022.10.4.,2024.9.9.진실화해 위원회 조사실・진술조서, 통화 보고서전문 (고모 최순덕등 집안 어른들, 마을 주민)•진실규명대상자 아버지 최○호(전남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낭주골)는 해방 후 농민회 활동을 했음.- 최○호는 광주사범학교를 나왔고, 이후 잠시 해남에서 교사로 재직했다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그 만두고 좌익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농민회 활동을 하였음.- 일제강점기에 최○호는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총 4 년 6개월 동안 징역을 살았음.- 해방 후 최○호는 집에 거의 없었음.•한국전쟁 이전부터 빨치산을 소통(소탕)한다는 명목으로 군경이 와서 지역 마을들을 초토화시켰음.•군경의 초토화 작전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, 어머니 최○수도 1948년 10월 13일에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음.•최○호는 좌익운동을 하다가 두 차례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음.- 최○호는 국가기록원에서 조회된 자료에 따라 1947년 초에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 다녀왔고,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또 다시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것 같음.•최○호가 두 번째로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, 최○호와 함께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살아나온 사람이 1950년 7월 15일에 최○호가 희생되었다고 전해주었음.•최○호의 제사는 7월 14일에 지냈음.•제적등본에 최○호는 1950년 7월 14일에 본적지에서 사망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, 큰형 최태용이 신고를 조금 늦게 한 것으로 알고 있음.•이웃에 살던 최대종의 아버지도 한국전쟁기에 희생되었음.711893장○섭 (1941)장○국 (張○國, 1916,아버지)2022.10.5.진실화해 위원회 5조사실・진술조서전문 (할머니, 누나 장○○ 등가족)•진실규명대상자 아버지 장○국(충북 영동군 양강면 양정리)은 농업에 종사했음.- 장○국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장준을 따라 사회주의 활동을 했음.•한국전쟁 발발 전에 장○국은 사상 문제로 연행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음.연번사건 번호 (2다-)신청인 (출생연도)진실규명 대상자 (한자명, 출생연도,관계)진술일 진술장소・진술형태목격 전문주요 진술 •할머니가 서대문형무소에 두 번 찾아가 장○국을 면회했음.- 첫 면회 때 장○국은 곧 풀려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지만, 두 번째 면회 때는 곧 풀려나기 힘들 것 같다고 하였음.•이후 장○국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전주형무소로 이감되었음.•한국전쟁 발발 후 장○국의 소식이 끊겨서 가족들은 장○국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여겼음.- 큰집 가족들을 포함하여 동네 사람 다수가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희생되었음.•장○국의 제사는 6월 말 또는 7월 초에 지냈음.•제적등본에 장○국은 ‘1968년 1월 26일 청주지방법원 부재선고’라고 기재되어 있는데, 신청인이 신고했으며 경위는 기억나지 않음.•할머니는 신청인이 어렸을 때부터 ‘연좌제를 조심해야 한다.’라고 말했고, 이후 신청인이 공무원으로 일 할 때 경찰들이 직장 동료나 가족 등 주변인들에게 신청인에 대해 묻고 다녀서 불쾌했던 기억이 있으며, 자식들이 연좌제를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이후 미국으로 이민하였음.•참고인으로 부천에 사는 누나 장○○이 있음.86192이○철 (1946)이○복 (李○福, 1929,숙부)2022.4.11.진실화해 위원회 3조사실・진술조서목격 (연행)・전문 (할아버지 이채현 등 가족,마을 어른들)•진실규명대상자 숙부 이○복(전남 함평군 해보면 금덕리 고모리부락)은 농사를 지었음.- 이○복은 국민학교를 졸업하였음.- 이○복은 씨름을 잘했음.•한국전쟁 발발 전에 사복을 입은 남자 2명이 집에 와서 이○복을 연행하는 걸 신청인이 직접 목격하였음.•며칠 뒤 마을 어른이 찾아와서 ‘이○복은 함평경찰서에 구금되어 있고, 벼 나락 2섬만 가져다주면 빼낼 수 있다.’라고 하였지만, 집안 형편상 벼 나락 2섬을 줄 수 없어서 이○복을 빼낼 수 없었음.•이후 이○복은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음.•이○복의 아버지 이채현이 1950년 초여름에 목포형 무소에 가서 이○복을 면회하였음.- 당시 이○복이 이발과 면도를 하지 못하고 몰골이 좋지 못했으며, 이채현에게 제대로 인사하지도 못 해서 이채현이 큰 충격을 받았음.•한국전쟁 발발 후 목포형무소에 트럭 몇 대분의 새끼줄이 들어갔고, 목포형무소 재소자들이 다 바다에 수장되었음.•이○복은 결혼 전에 사망해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음.•제적등본에 이○복은 1961년 5월 1일 본적지에서 사망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, 그 경위는 모르며, 당시는 사망신고가 제대로 기재되던 때가 아니었음.•이○복의 사망으로 인하여 이채현이 홧병을 앓다 사망했고, 가족들은 ‘빨갱이 가족’이 되어 기죽어 살았음.98193고○용 (1941)고○문 (高○文, 1897,아버지)2022.4.7.진실화해위원회목격 (연행, 면회)・전문•진실규명대상자 아버지 고○문(전남 완도군 소안면 미라리2구)은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음.- 고○문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자금을 제공하던 위친계에 가입하였음.연번사건 번호 (2다-)신청인 (출생연도)진실규명 대상자 (한자명, 출생연도,관계)진술일 진술장소・진술형태목격 전문주요 진술 1조사실・진술조서(고차동 등 친척)- 미라리2구의 항일운동 지도자는 정남국이었음.-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가학리의 이○○과 미라리의 김○○이 경찰의 앞잡이가 되어서 마을 사람들을 좌익이라고 고발하였음.•고○문도 1949년 음력 5월에 집에서 김○○과 이○○에게 연행되었고, 신청인과 가족들이 이를 직접 목격하였음.- 당시 고○문의 딸 고○○가 고○문이 연행되는 걸 보며 울었음.•고○문은 마을회관에 구금되었고, 고○문의 처 박복업이 밥을 해서 전해주었음.•다음날 고○문은 소안지서에 구금되었고, 이후 고○ 문의 소식이 끊겼음.•몇 달 뒤에 목포에 살던 친척 고차동이, 고○문이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가족에게 알려주었음.•1950년 봄에 신청인과 박복업이 목포에 가서 목포형무소 노역장에서 고○문과, 다른 마을 사람 채○돌을 면회하였음.- 형무관들이 약 5분간의 면회만을 허락하였음.- 고○문은 ‘1년 정도만 더 고생하면 돌아갈 것이다.’라고 하였음.- 면회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○문과 채○돌이 신청인과 박복업에게 손을 흔들었음.•한국전쟁이 발발하고, 마을이 조용해진 이후에 고차동이 ‘고○문 등 목포형무소 재소자들이 부산형무소로 간다고 속아서 배에 실려 목포 앞 칠발도 바다에 수장되었다.’라고 전해주었음.•고○문의 제사는 고차동이 전한 음력 5월 27일(양력 1950년 7월 12일)에 지냈음.•제적등본에 고○문이 1973년 10월 5일에 사망했다 고 기재되어 있는데, 실제 사망 일자가 아니며, 사망 신고를 면사무소 직원 김남환이 대신 해주었음.•고○문의 사후 가족들은 “빨갱이 자식”이라는 누명을 쓰고 손가락질받으며 살았음.108760이○자 (1941)김○규 (金○圭, 1927,시숙)2023.4.12.가학리 마을 정보센터・진술조서전문 (시할머니 이매단, 남편 김갑동 등 가족)•진실규명대상자 시숙 김○규(전남 완도군 금일면 가학리)는 농업에 종사하였음.- 김○규는 신청인의 시아버지 김동이의 동생임.- 신청인은 완도군 금당면 차우리 출신으로 가학리에 시집왔음.•김○규는 한국전쟁 발발 전에 집에서 경찰들에게 연행되었음.- 김○규가 결혼한 지 3개월만에 일어난 일임.•김○규는 장흥에서 재판을 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음.•김○규의 어머니 이매단이 목포형무소에 가 김○규를 면회하였음.•한국전쟁 발발 후 목포형무소에서 김○규 등 재소자들을 바다에 퍼부어서 죽였음.•김○규의 제사는 음력 6월 6일(양력 1950년 7월 20일)에 지냈고, 마을에서 7개 가구가 같은 날에 제사를 지냈음.- 마을에서 김○규와 같은 경위로 희생된 주민들이 많았음.연번사건 번호 (2다-)신청인 (출생연도)진실규명 대상자 (한자명, 출생연도,관계)진술일 진술장소・진술형태목격 전문주요 진술 •김○규는 제적등본에 1956년 10월 23일 본적지에 서 사망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, 사망신고 경위는 모르며 내용은 사실과 다름.•김○규의 연행과 희생으로 김○규의 처는 재혼해야 했음.115466김○심 (1946)김○화 (金○化, 1925,아버지)2022.5.19.함평사건 유족회 사무실 (전남 함평군 월야면 월야리)・진술조서/ 2025.4.2.통화보고서전문 (할머니 박막녀, 어머니이복순, 삼촌 김형주등 가족)•진실규명대상자 아버지 해방촌 하수구 김○화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죽암리 서명마을에 살며 농사를 지었음.•김○화는 똑똑해서 한국전쟁 발발 전에 경찰 시험에 합격하였음.•김○화는 발령받기 전에 경찰에 연행되어 재판을 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음.•가족들은 김○화가 왜 연행되었는지 몰랐음.•김○화는 한국전쟁 발발 후 목포형무소에서 희생되 었음.•김○화의 시신은 못 찾았고, 제사는 음력 6월 5일(양력 1950년 7월 19일)에 지냈음.1210917고○재 (1948)고○석 (高○錫, 1922,아버지)2023.11.2.전남 장흥군 용산면 어동 마을회관・진술조서목격 (면회)・전문 (숙모 김○○, 고모 고효순등 가족)•진실규명대상자 아버지 고○석(전남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 외평마을)은 학교 교사였음.- 숙부 고△석은 농부였고, 함께 살던 다른 숙부 고□석은 학교 교사였음.- 고○석과 고□석은 사범학교를 나왔고, 고△석은 국민학교를 나왔음.- 고○석은 장흥, 안양, 관산국민학교에서 근무했고, 고□석은 광주서석국민학교에서 마지막으로 근무 했음.•고○석은 한국전쟁 발발 전에 경찰에게 세 번쯤 연행되었고, 세 번째 연행될 때에는 관산국민학교에서 연행되었음.- 경찰들이 고○석을 찾으러 집에 왔길래, 가족들이 ‘고○석은 관산국민학교에서 일하고 있다.’라고 알 려주었다가 고○석이 연행되었음.•고○석은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음.- 고○석은 징역 7년을 선고받았음.•고○석의 처가 신청인을 업고 목포형무소에 가서 고○석을 면회하였음.- 신청인이 세 살 때(1950년경) 일이고, 영암 용당에서 목포로 건너가며 철선을 타고, 버스를 타던 기억이 남.•한국전쟁 발발 후 목포형무소 재소자들이 다 수장되었다는 소문이 퍼져서 가족들은 고○석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여겼음.•고○석의 제사는 목포형무소 재소자들이 다 죽었다는날짜인 음력 6월 2일(양력 1950년 7월 16일)에 지냈음.•제적등본에 고○석은 1950년 6월 6일 본적지에서 사망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, 날짜는 음력으로 신고 된 것 같고(양력 1950년 7월 20일), 사망 장소는 잘못되었음.•고△석과 고□석은 1950년 말에 국군이 동네를 수복하였을 때 좌익가족이라는 이유 등으로 관헌에 쫓연번사건 번호 (2다-)신청인 (출생연도)진실규명 대상자 (한자명, 출생연도,관계)진술일 진술장소・진술형태목격 전문주요 진술 기다가, 고□석은 유치면에서 집단 총살되었고, 고△ 석은 경찰에 연행되었음.- 고□석은 시신을 못 찾았음.•고△석은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사망하였음.- 광주형무소에서 고△석에게 밥을 잘 주지 않아서 고△석의 처 김○○과, 고○석의 처 위복순이 교대로 광주까지 가서 먹을 걸 전달하였음.•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사망한 마을 사람들은 고영곤의 부친, 고영도의 부친, 고영립의 부친, 고영채의 부친이 있고, 그 외에 안양수문에서 집단 수장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알고 있음.•신청인은 대학교를 졸업한 뒤 고위공무원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고, 언론사에 취직하려 했을 때는 아버지의 경력을 묻는 질문에 솔직하게 답할 수 없었으며 마음이 괴로웠음.- 신청인이 1979년에 다른 기자들과 함께 편집권의 독립을 외치며 농성한 적이 있는데, 그때 사장실에서 신청인을 호출해서 중앙정보부 문서라는 걸 던져주며 ‘너네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거 다 알고 있다.’라고 하였음.- 신청인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출장을 가려다가 너무 까다로운 신원 조회를 받아서 출장 기일에 맞추지 못해 출국하지 못한 적이 있음.- 사촌동생 고영용(고△석의 아들)은 고△석의 사망 으로 인하여 어렸을 때 밥을 잘 못 먹어서 병을 많이 앓았고, 커서 공무원으로 일할 때는 채용시 받은 신원조회 서류가 발령지마다 계속 따라다녀 근무처에 한계가 있었음.1312947이○주 (1947)이○현 (李○鉉, 1923,아버지)2023.11.2.전남 장흥군 장흥읍 예양2구 마을회관・진술조서전문 (어머니박복심, 고모 이○○ 등 가족)•진실규명대상자 아버지 이○현(전남 장흥군 장흥읍 성불리2구 복흥마을)은 농사를 지었고, 마을 이장이 었음.- 이○현의 이명은 ‘이△현’임.- 신청인은 실제로는 1946년생임.- 집안은 아주 어려워서 봄이 되면 곡식을 빌렸고, 가을에 갚으며 살았음.- 이○현은 이장으로서 대한민국 정부에 충성하였음.- 성불리 뒷산에 성이 있었는데, 한국전쟁 전에는 반란군이 그곳에 있다가 밤에 내려왔고, 낮에는 경찰들이 마을을 지키는 등 혼란하였음.- 신청인이 어릴 때에도 마을엔 경찰 분소가 있었 고, 뒷산에는 반란군들의 장비와 서류들이 남아 있었음.- 다른 부락에 남로당 간부가 있었음.•한국전쟁 1~2년 전 가을에 마을 주민 김○○가 산속의 반란군에 연루가 되어서 경찰에 연행되어 심문을 받았는데, 김○○는 이장인 이○현을 지목해서 이○ 현까지 경찰에 연행되었음.- 경찰들이 집에 와서 이○현을 연행하였고, 이○현의 처 박복심이 이○현의 연행을 목격하였음.- 김○○는 이○현을 지목하고 석방되었음.- 이○현이 없을 때 이○현의 딸 이홍님이 호적상 1950년 3월 12일에 유복자로 태어났음.•이○현은 장흥경찰서에 구금되었음.연번사건 번호 (2다-)신청인 (출생연도)진실규명 대상자 (한자명, 출생연도,관계)진술일 진술장소・진술형태목격 전문주요 진술 - 이○현의 외사촌 형이 경찰이었는데, 자신의 위신 만을 생각해서 이○현의 뺨을 때리는 등 격하게 반응하였음.- 가족들이 계속 장흥경찰서에 오갔고, 소 한 마리 값을 주면 이○현을 석방시킬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소를 팔아 돈을 전달했는데 이○현은 석방되지 않았음.•이후 이○현은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음.- 이○현의 아버지 이권동과 어머니 정부덕, 이○현의 처 박복심 등이 면회를 갔음.- 이○현은 목포형무소에서 나무로 농을 짜는 기술을 배우며 재밌어했고, 출소하면 농 짜는 기술로 돈을 벌 계획이라고 이야기하였음.- 목포형무소 안에서 이○현은 모범수로 분류되었음.•이○현이 모범수로서 만기출소를 앞두고 있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, 마을 출신으로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다른 주민 한 명이 석방되어 ‘이○현도 곧 돌아올 것이다.’라고 하였는데 이○현은 돌아 오지 않았고, 이후 목포형무소에서 사상을 가진 재소자로 판단된 사람들을 다 수장시켰다는 소문이 돌았음.•이○현의 제사는 목포형무소 재소자들이 수장되었다는 음력 6월 2일(양력 1950년 7월 16일)에 지냈음.•제적등본에 이○현은 1950년 9월 5일에 본적지에서 사망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, 당시 노인들이 사망신고를 잘 처리하지 못해서 아이들의 출생년도와 이름이 수시로 바뀌었고, 사망일과 장소도 잘못 신고되기 쉬웠음.•마을에선 경찰들에 의해 주민 최소 네 명이 더 죽어서 미망인이 넷 있었고, 그들은 모두 시신을 수습해 묘가 있었음.- 다른 부락의 남로당 간부는 신청인이 국민학교 4 학년 때 만기출소해서 마을로 돌아왔고, 그 자식들은 연좌제 때문에 취직이 안 됐음.•신청인은 1970년대 중반경 잡부 사업을 할 때 장흥에 도로를 내던 소장과 친해져서 함께 외국에 가려다가 가족들이 다 형사들의 조사를 받게 되어 그제서야 이○현의 사망 경위에 대해 박복심으로부터 자세히 듣게 되었고, 그 이후 큰일을 하려는 건 포기하였음.- 신원조회를 받으니 창피하였음.1412971김○숙 (1948)김○현 (金○炫, 1928,아버지)2023.10.31.빛고을 아트스페이스 4층・진술조서전문 (할아버지 김주선, 할머니 박신녀, 어머니 천일덕, 숙부 김○○ 등 가족)•진실규명대상자 아버지 김○현(전남 영암군 삼호면 용앙리 중앙촌 샘건너)은 면사무소 직원이었음.- 김○현은 보통학교를 나왔음.•김○현은 한국전쟁 전에 누명을 쓰고 경찰에 연행되었음.•김○현은 장흥에서 재판을 받았고, 김○현의 어머니 박신녀가 재판을 참관하였음.•이후 김○현은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음.•박신녀가 목포형무소로 김○현의 면회를 다녔음.- 김○현은 목포형무소에서 목공 기술을 배웠음.•한국전쟁 발발 후 김○현 등 목포형무소 재소자들이 목포 앞바다에 수장되었음.연번사건 번호 (2다-)신청인 (출생연도)진실규명 대상자 (한자명, 출생연도,관계)진술일 진술장소・진술형태목격 전문주요 진술 - 김○현과 함께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김○현의 매형 오○현도 그때 수장되었음.•김○현은 손목에 이름과 주소를 새긴 명표를 차고 있었기 때문에 김○현의 시신이 신안군 지도에 떠내려왔을 때 지도 주민들이 김○현의 이름과 주소를 기억한 뒤 시신을 매장해두었음.•신청인이 국민학교 4학년 때(1958년경) 김○현의 시신이 지도에 매장된 사실이 전해져서 박신녀가 지도에 가서 명표를 확인하고 김○현의 시신을 수습해왔음.•김○현의 묘는 선산에 만들었고, 제사는 김○현의 아버지 김주선의 제삿날인 음력 5월 13일(양력 1950년 6월 28일)에 함께 지냈음.•제적등본에 김○현은 1950년 7월 10일 본적지에서 사망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, 당시 사망신고는 면사무소 직원들이 대강 적었음.•김○현의 다른 매형 김○호는 한국전쟁 발발 전에 누명을 쓰고 경찰에 연행되어 영암경찰서에서 총살되었음.2025. 1. 1. ~ 2025. 6. 30. 187피해 관련 참고인 주요 진술 내용연번사건 번호 (2다-)진실 규명 대상자 (한자명)참고인주요 진술성명 (한자명, 성별,출생연도)관계・당시거주지진술시기 진술장소 (진술형태)목격 전문1143-5이○상 (李○相)이○○ (李○○, 남, 1941)이웃・ 경남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2024.5.27.참고인 자택 (경남 산청군 단성면)・진술조서전문 (아버지, 집안 형님들 등 가족, 마을 주민)•진실규명대상자 이○상(경남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 산성마을)은 참고인의 먼 친척뻘 되며 참고인의 집과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살았음.- 이○상은 농사를 지었음.- 이○상은 요새 말로 야당 기질이 조금 있었던 것 같고, 지금 같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활동했음.- 마을은 성주 이씨 집성촌이어서 별다른 갈등 같은 건 없었음.- 요새 말로 야당을 보도연맹이라고 불렀던 걸로 알고 있고, 이○상도 보도연맹이라고 들었음.- 한국전쟁이 나고 인민군이 내려오기 전에 보도연맹으로 잡혀간 사람들이 진주 가는 길 명석면 골짜기에서 많이 죽었다고 들었는데, 이○상은 그보다 한참 전에 잡혀갔음.•이○상은 한국전쟁 발발 몇 년 전에 산청 경찰에 연행되었고, 지금과는 달리 영장 같은 것도 없이 무법적으로 잡혀갔다고 들었음.- 이○상은 요새 말로 야당 기질이 있다고 해서 잡혀갔음.•이후 이○상은 산청경찰서를 거쳐서 전주형무소로 간 것 같음.- 돈을 좀 썼으면 이○상이 나왔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음.•이○상은 전주형무소에서 나올 줄 알았는데 한국전쟁이 났다고 총살됐다음.(함) 시신을 찾으려고 전주까지 몇 번 오가는 등 노력을 많이 했지만 결국 시신은 못 찾았다음. (함.)•한국전쟁 발발 후 참고인의 가족은 먹고살 만하다고 우익으로 몰려 소를 빼앗기고 총으로 협박 받는 등 빨치산들에게 괴롭힘을 받았음.•이○상의 아버지가 홧병으로 오래 살지 못 했고, 이○상의 아들 이○우는 세무공무원 시험을 봤는데 신원조회에 걸려 떨어졌음.2143-5이○상 (李○相)남○○ (南○○, 남, 1948)이웃・ 경남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2024.5.27.신안면 복지회관 2층 다목적실・진술조서전문 (가족, 마을 주민)•진실규명대상자 이○상(경남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 산성마을)은 참고인의 집과 50m 정도 떨 어진 곳에 살았음.- 이○상은 농사를 지으면서 서당에 다니며 동네 아이들에게 야학을 가르쳤음.- 이○상은 초등학교를 나왔음.- 마을은 시골의 조그마한 동네였고, 다들 근근 이 살았음.•이○상은 한국전쟁 몇 년 전에 보도연맹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갔다고 마을 주민들과 가족들에게 들었음.- 보도연맹은 일종의 좌파 단체라고 들었음.- 이○상이 좌익이 아니었는데도 좌익으로 몰렸다고 들었음.연번사건 번호 (2다-)진실 규명 대상자 (한자명)참고인주요 진술성명 (한자명, 성별,출생연도)관계・당시거주지진술시기 진술장소 (진술형태)목격 전문 •이○상은 경찰에 연행된 뒤 전주형무소로 갔다고 들었음.- 이○상의 가족이 전주형무소로 면회를 갔음.•이○상은 한국전쟁이 나는 바람에 전주형무소에서 사망했음.•이○상의 아버지가 이○상의 시신을 찾으려고 전주에 갔는데 찾지 못 했음.•한국전쟁 때 빨치산이 내려와서 마을 주민들을 많이 괴롭혔음.•이○상의 사망 이후 그 가족들은 되게 힘들게 살았고, 이○상의 아들 이○우는 국민학교 때 돈이 없어서 경주로 수학여행을 못 갈 뻔했는데 담임선생님이 돈을 줘서 겨우 갈 수 있었음.- 가족이 사상 관계로 사망한 사람들은 공무원 등을 할 수 없었다고 들었음.3143-5이○상 (李○相)권○○ (權○○, 남, 1948)사돈・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2024.5.27.신안면 복지회관・진술조서전문 (집안어른들 등)•진실규명대상자 이○상(경남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 산성마을)은 참고인과 6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았음.- 참고인은 1990년대 후반에 단성초등학교 총 동창회장을 하면서 단성초등학교 출신인 이○상의 희생에 대해 들었음.- 참고인의 사촌 누나가 이○상의 집안에 시집을 가면서 두 집안이 사돈 관계가 되었고, 이 후에서 양 집안 사이에 많은 혼사가 이루어졌는데 그때도 이○상의 억울한 희생에 대해 들었음.- 참고인의 집안이 완고한 보수 집안이라 이○ 상이 사상 또는 빨치산과 관련 있었다면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임.- 당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지식이 많은 편이어서 이○상은 농사를 지으며 야학 선생도 했음.•이○상은 한국전쟁 전에 신안지서 순경에게 연행되었음.- 참고인이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산청군수를 역임하면서 이○상이 연행될 무렵에 좌우익의 갈등이 심해지며 무고하게 잡혀가서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다는 걸 알게 되었고, 이○상도 좌익 및 빨치산과 관련이 없었는데 억울하게 잘못 지목되어 연행되었다고 집안 어른들에게 들었음.•이○상은 산청경찰서와 남원을 거쳐서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음.•이○상은 한국전쟁 발발 후 전주형무소에서 희생되었음.•이○상의 자녀들은 이후 경제적 어려움과 연좌제로 고통받았음.4143-5이○상 (李○相)이△상 (남, 1939)동생・ 경남 산청군 신안면2008.2.25.・전화조사서목격 (연행)・전문 (아버지•진실규명대상자 이○상(경남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)은 농사를 지었고, 야학을 하며 동네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음.- 이○상은 단성국민학교를 나왔고 한문을 많이 했음.연번사건 번호 (2다-)진실 규명 대상자 (한자명)참고인주요 진술성명 (한자명, 성별,출생연도)관계・당시거주지진술시기 진술장소 (진술형태)목격 전문 중촌리 이찬수 등 가족)- 아버지 이찬수는 천상 선비라 돈도 잘 몰랐고, 이○상이 가족을 부양했음.- 1946년경에 신안면 주민들이 흉년에도 강제적으로 보리를 공출하려는 정부에 항의하여 신안면사무소 앞에서 대대적으로 반대 시위를 하였고, 그 과정에서 신안면 한빈마을 주민 한 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음.- 신안면 주민들은 사망한 주민의 장례를 면민장으로 하려고 했는데, 당시 이○상이 분주하게 어디를 오갔음.•1948년 봄경에 이○상은 하동 출신의 ‘정순경’에게 연행되었음.- 당시 이○상은 외출했다가 귀가하고 있었고, 집에서 기다리던 ‘정순경’이 가자고 하니 두루마기를 벗어 마루 위에 올려놓고 포승줄에 묶여 ‘정순경’을 따라갔음.- 이○상이 안 보일 때쯤에 총소리가 들려 가족들이 놀랐으나 다행히 이○상이 총살되는 소리는 아니었음.- 어떤 사람이 지리산에서 경찰들 총에 맞아 죽었는데, 그 사람이 무슨 명단을 가지고 있었고, 그 명단 속에 이○상의 이름이 있었다고 함.•이후 이○상은 신안지서와 산청경찰서, 남원경찰서를 거쳐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, 아버지 이찬수가 계속 이○상의 면회를 다녔음.•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주가 국군에 수복되었을 때 이찬수가 전주에 갔다가,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군이 후퇴하면서 전주형무소 재소자들을 사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음.•가장 역할을 하던 이○상이 연행된 후 참고인은 학비 걱정을 많이 하게 되었고, 이○상의 아들 이○우는 공직에 진출하려다 포기했음.•아무리 사상범이라도 무기를 들고 반항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억울하게 죽은 것 같고, 더 중요한 것은 전주형무소에서 확실하게 총살당한 것인지 아는 것임.5143-5이○상 (李○相)이○○ (남, 1928)이웃・ 경남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2010.1.15.경남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・진술녹음전문 (마을주민)•진실규명대상자 이○상(경남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)은 농사를 지었음.- 이○상은 동네에서 ‘이□상’이라고 불렀음.•이○상은 한국전쟁 발발 전에 집에 있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산청경찰서에 구금되었음.- 아무 별일도 없었는데 경찰이 왜 갑자기 이○ 상을 연행했는지 모르겠음.- 마을 주민들은 이○상이 억울하게 잡혀갔다고 여겼음.•이후 이○상은 전라도 쪽 형무소에 수감되었음.•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○상이 집에 돌아오지 않자 마을 주민들은 이○상이 세상 버렸을 것이라고 여겼음.6708김○성 (金○成)김○○ (金○○, 남, 1938)사촌・전북2025.3.5.무장면 행정복지센터전문 (큰어머니 박금옥 등•진실규명대상자 김○성은 참고인의 사촌형이며 참고인의 고향 전북 고창군 무장면 목우리 신흥 마을에서 2km 정도 떨어진 무장면 옥산리 죽림연번사건 번호 (2다-)진실 규명 대상자 (한자명)참고인주요 진술성명 (한자명, 성별,출생연도)관계・당시거주지진술시기 진술장소 (진술형태)목격 전문 고창군 무장면2층 회의실 (전북 고창군 무장면)・진술조서가족,친척)마을에 살았음.- 김○성은 농사를 지었음.- 참고인은 명절 때 김○성을 보곤 하였음.- 김○성이 살아 있을 때 그 가족들은 괜찮게 살았는데, 김○성이 희생된 후 어렵게 살 았음.- 한국전쟁 전에 마을은 대체로 평화로웠음.•김○성은 한국전쟁 전, 가을 벼 베고 나서 추울 때 집에 온 총 든 사람 두 명에게 갑자기 연행되 었음.- 김○성은 억울하게 연행되었음.•김○성은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음.•김○성의 어머니 박금옥(참고인의 큰어머니)이 전주형무소에서 김○성을 면회하였음.•김○성은 한국전쟁이 발발해서 전주형무소에서 희생되었음.- 한국전쟁 때 참고인이 살던 마을에서도 사람 들이 더러 희생되었음.•김○성의 제사는 추울 때 지냈는데, 집에서 나간 날(연행된 날)이라고 들었음.•김○성이 희생된 후 남은 가족들이 고생하며 살았음.72104안○ (安○)안○○ (安○○, 남, 1943)동생・ 전북 김제군 백산면2024.8.14.삼양다방 (전북 전주시 완산구 경원동2가)・진술조서전문 (김○○ 등 마을 주민, 아버지 안용식 등 가족)•진실규명대상자 안○(전북 김제군 백산면 하정리 불로동)은 참고인의 큰형임.- 마을의 지금 이름은 소라마을임.- 안○은 자식이 없던 큰어머니의 양자가 되어서 참고인의 옆집에 살았음(큰어머니의 자식 들은 다 어린 나이에 사망했음).- 안○은 어디 학교를 다녔다고 들었는데 학교 명이 기억 안 남.- 집안 형편은 좋아서 농사를 한 70~80 마지기 지었음.- 안○은 군청에 다녔다고 이웃 김○○에게 들 었음.- 다른 군청 직원들이 안○을 계속 꼬드겼고, 안○은 그 사람들을 피해 다녔음.- 안○이 다른 군청 직원들을 피해서 담벼락을 넘어 도망치던 모습이 기억남.•안○은 참고인이 8살 때(1949년) 경찰에 연행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음.- 안○을 꼬드기던 사람들 때문에 안○도 연행 된 것 같음.- 안○을 쫓던 경찰들이 몇 차례 마을에 찾아와 안○의 행방을 물으며 아버지 안용식을 구타 하곤 했음.- 당시 이웃 마을에서도 몇 명이 함께 연행되었음.- 당시 누군가 안○의 집에 불을 질렀음.•당시 경찰에 연행된 사람들은 김제경찰서에 구금되었음.- 아버지 안용식이 안○을 석방시키기 위해 돈을 많이 썼음.- 당시 집안 재산이 많이 사라졌음.연번사건 번호 (2다-)진실 규명 대상자 (한자명)참고인주요 진술성명 (한자명, 성별,출생연도)관계・당시거주지진술시기 진술장소 (진술형태)목격 전문 •이후 안○은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, 한국전쟁이 났을 때 철수하던 국군이 전주형무소에 불을 질러서 죽었다고 이웃 김○○에게 들었음.- 김○○는 안○이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똑똑 했는데 꼬임에 넘어가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6.25 때 죽었다고 이야기하곤 했음.•제적등본에 안○은 ‘1951. 3. 2. 본적지에서 사망’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, 잘못된 내용이며 연좌제를 피하려고 아버지 안용식이 그렇게 신고 한 것 같음.•안○의 제사는 집에서 나간 날에 지냈는데 날짜가 기억나지 않음.•사건 내용을 잘 알던 김○○는 사망했고, 소라 마을에 내용을 잘 아는 참고인은 없음.•이웃 마을에서도 몇 명 연행되어 희생되었다는데 인적사항은 모르고, 전쟁 때는 마을이 폭격을 많이 당했음.•안○이 사망한 후 형수는 슬퍼하다 곧 병을 얻어 사망했음.•형 안△△의 딸이 ○○제과 사장 비서직에 지원 했다가 김제군, 백산면사무소, 백산지서를 통해 신원조회가 왔고, 안○이 사망한 경위 때문에 비서가 될 수 없었음.- 조카 안○순, 안○자, 안○수도 똑똑한데 안○의 신원 문제 때문에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일이 안 풀렸음.- 후손들이 취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, 지서를 통해 동네로 신원조회가 나왔음.82104안○ (安○)안△△ (安△△, 남, 1936)동생・ 전북 김제군 백산면 하정리 불로동2022.11.8.전북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635 (참고인 자택)・진술조서전문 (아버지 안용식 등 가족)•진실규명대상자 큰형 안○(전북 김제군 백산면 하정리 불로동)은 참고인과 함께 살고 있었음.- 안○은 1947년경 감옥에 가서 형을 살고 나온 적이 있고, 그 이후엔 다른 데 나가지도 않고 집에 있었음.•1949년 7월경 호미로 김맬 때 안○의 친구들이 큰 형을 찾아왔고, 안○은 동네 김을 다 맸다며 친구들이랑 술 한 잔 마시러 간다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음.- 안○은 해방촌 하수구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으며, 친구들과 어울리기만 했음.- 안○뿐 아니라 함께 나간 친구들이 다 같이 돌아오지 않았음.•안○은 어디론가 연행됐고, 그 때문에 아버지가 어디 지서 또는 경찰서로 몇 번 불려갔음.•아버지는 9・28 수복 후 안○과 그 친구들을 찾 으러 다녔지만 몇 년간 소식이 없어 안○과 그 친구들이 죽었겠다고 여겼음.92104안○ (安○)안□□ (安□□, 남, 1933)동생・ 전북 김제군 백산면 하정리2022.11.8.전북 김제시 백산면 소라길 29 (참고인 자택)전문 (가족들)•진실규명대상자 형 안○(전북 김제군 백산면 하정리 불로동)은 참고인과 함께 살며 농업에 종사 했음.- 안○은 1947년에 감옥에 가서 형을 살고 왔음.•안○은 1949년 칠월 칠석날 집 밖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고 들었음.연번사건 번호 (2다-)진실 규명 대상자 (한자명)참고인주요 진술성명 (한자명, 성별,출생연도)관계・당시거주지진술시기 진술장소 (진술형태)목격 전문 불로동・진술조서 - 안○은 잡혀갈 만한 일과 아무 관련이 없었는 데 억울하게 연행된 것 같음.•안○은 어디로 잡혀갔다가 죽었다고 들었음.102441하○남 (夏○男)하○○ (夏○○, 남, 1935)숙부・ 전북 순창군 적성면 팔덕면 장안리2022.10.12.전북도청 3층 소회의실전문 (아버지 하종구 등 가족, 마을 주민들)•진실규명대상자 양○규는 전북 전주시에 거주하고 있었고, 참고인의 숙모 양○남의 사촌임.•참고인의 숙부 하○남은 팔덕초등학교 교사였는데, 고향 전북 순창군 적성면 팔덕면 장안리에서 좌익으로 여겨질 것을 우려하여 한국전쟁 전에 처가 친척인 양○규가 살고 있는 전주로 갔음.•하○남은 자신을 시기하던 옆 마을 김 씨에게 밀고돼서 한국전쟁 발발 전에 경찰에 연행되었고, 그때 양○규도 함께 연행되었음.•하○남과 양○규는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, 양○남과 하○남의 장모가 전주형무소에 여러 차례 면회를 다녀왔음.•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하○남과 양○규 등 전주형무소 재소자들이 다 희생었음.•하○남이 희생된 후 양○남과 사촌동생 하○수가 어렵게 살았음.1111879최○호 (崔○鎬)최○○ (崔○○, 남, 1938)이웃・ 전남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신흥동2024.4.17.참고인 자택 (서울시 성동구 하왕십리동)・진술조서전문 (고모 최순덕 등가족, 집안 어른들)•진실규명대상자 최○호(전남 영암군 군서면)는 일제강점기에 광주사범학교를 나오고 독립운동을 했음.•최○호는 군서면 부면장을 했고, 좌익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.•해방 후 경찰들이 최○호를 잡기 위해 최○호의 부인 최○수를 잡아 평리마을 입구에서 죽였음.- 당시 최○수는 아들 최○옥을 안고 있었는데 최○옥이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르고 젖을 빨고 있었음.•음력 1950년 12월 12일(양력 1951년 1월 19일)에 참고인의 아버지 최○관과 최○호의 어머니 이○동이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는데, 최○호는 그 전에 죽었음.•최○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히 모르며, 한국전쟁 발발 전에 경찰에 잡혀 죽은 것 같음.1211879최○호 (崔○鎬)최○○ (崔○○, 남, 1936)이웃・ 전남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 3리 신흥동2008.5.22.평리 마을회관 (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2리)・진술조서전문 (집안 어른들)•진실규명대상자 최○호(전남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남송리)의 처 최○수가 한국전쟁 발발 전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음.•최○호도 사상 문제로 경찰에 잡혀가 죽었음.•최○호의 모친 이○동은 음력 1950년 12월 12 일(양력 1951년 1월 19일)에 덕진면 영보리 야산의 일제 때 방공호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되었고, 당시 참고인의 아버지 최○관과 백모 오○례(최○원의 처), 최○호의 숙모 조○순, 조○순의 아기도 죽었음.1311879최○호 (崔○鎬)최○○ (여, 1934)이웃・ 전남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2023.8.7.참고인 자택 (서울시 중구 신당동)・진술조서전문 (가족, 마을 주민)•진실규명대상자 최○호(전남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남송정마을)는 일제강점기에 군서면 부면장을 했음•최○호의 아들 최○옥이 세 살 때(1948년) 최○옥의 어머니 최○수(최○호의 처)가 좌익으로 몰려 경찰에 연행되어 희생되었음.연번사건 번호 (2다-)진실 규명 대상자 (한자명)참고인주요 진술성명 (한자명, 성별,출생연도)관계・당시거주지진술시기 진술장소 (진술형태)목격 전문 리 남송정 마을 - 마을의 첫 번째 희생이었음.•이후 서호정마을에 살던 최○순을 포함한 여성 4명이 경찰에 잡혀 죽었음.•최○호는 그 이전에 전주형무소로 끌려가 집에 없었고, 나중에 전주형무소에서 죽었다는 소문 이 들렸음.•최○호의 시신은 못 찾아왔음.•최○호의 어머니 이○동은 구림 첫 포위 사건(1950년 10월 17일) 이후에 희생되었음.1411879최○호 (崔○鎬)최○ (崔○, 남, 1931)이웃・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2010.1.13.참고인 자택 (광주 광역시 동구 산수동)・진술조서전문 (마을주민)•진실규명대상자 최○호(전남 영암군 군서면 서 구림리)는 한국전쟁 발발 전 전주형무소에 수감 되었음.•군서면 도갑리에 살던 참고인의 친구 최○구와,1년 선배 박희용이 좌익청년회에서 심부름하다 가 서울 쪽 형무소에 수감되었고, 동구림리에 살 던 조계암도 서울 쪽 형무소에 수감되었음.•최○호와 최○구, 박희용, 조계암은 인민군 점령기 때 고향에 내려오지 않아서 고향 사람들은 그사람들이 다 죽었을 것이라고 여겼음.1511893장○국 (張○國)장○○ (張○○, 여, 1937)딸・ 충북 영동군 양강면 양정리2024.5.3.경기 부천시 원미구 은하마을주공 1단지아파트 입주자대표 회의실・진술조서전문 (할머니 등 가족, 전주 형무소 형무관)•진실규명대상자 아버지 장○국(충북 영동군 양강면 양정리)은 양복점을 운영한 것 같음.- 아버지는 남정국민학교를 나온 것 같음.- 아버지는 학교 교사에서 일할 것을 제안받았으나 돈을 벌겠다고 함흥에 가서 생태와 오징어 도매업을 하며 많은 돈을 벌었음.- 그러다 누군가 아버지를 구타하고 돈을 뺏었 고, 이에 가족들은 참고인이 6살 때쯤에 영동으로 돌아와 살았음.- 아버지는 영동읍에 양복점을 차린 것 같았고, 늘 신사복을 입고 천을 가지고 다녔음.-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이 모이면 이북은 잘 사는데 우리나라는 못 산다고 열심히 일해서 없는 사람들 잘 살게 해줘야 한다고 연설하였음.- 마을에서는 아버지와 장준의 아들이 유명했음.- 장준의 가족들은 아버지가 만류하였음에도 이북으로 갔음.- 마을에 보도연맹원이 많았음.- 당시 청년단도 있었는데 여러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 경찰에 넘겨주곤 했음.•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나기 전에 아버지를 악담하고 다니던 사람에게 사람을 때리고 죽였다고 밀고당해서 경찰에 연행되었음.- 아버지는 집으로 찾아온 경찰들을 영문도 모르고 따라가 연행되었다고 할머니에게 들었음.- 아버지는 그 전에도 경찰에 한 번 연행된 적 이 있었는데 그때는 누명을 해소해서 풀려났음.- 아버지가 연행될 무렵에 어머니가 홧병으로 사망하였음.•아버지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고, 할머니가 서울로 아버지를 면회하러 다녔음.- 할머니는 아버지 면회를 다녀와서 ‘형무소에연번사건 번호 (2다-)진실 규명 대상자 (한자명)참고인주요 진술성명 (한자명, 성별,출생연도)관계・당시거주지진술시기 진술장소 (진술형태)목격 전문 서 아버지 얼굴에 지푸라기로 된 용수를 씌워 놔서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.’라고 이야기해 주었음. 하지만 대화는 가능했다고 들었음.-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‘곧 나올 거다. 나는 죄 가 없다.’라고 했지만, 할머니가 나중에 면회를 갔을 때는 ‘곧 나오기 어렵게 됐다. 항소하겠다. 항소하면 잘 될 거니 어머니께서는 오지 마시라.’라고 이야기했다고 들었음.- 아버지가 항소할 때 판사가 ‘이건 억울한 일이다.’라며 아버지의 억울함을 알아주었다고 할머니에게 들었음.•이후 아버지가 전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는 연락이 왔음.•아버지가 전주형무소로 이감된 뒤 할머니가 전주에 가보려고 했는데 그 사이에 한국전쟁이 나서 가지 못하였음.•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마을에서는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경찰에 끌려가서 희생되었음.- 당시 경찰이 사람들을 두들겨 패며 줄로 엮어서 끌고 갔고, 그 과정에서 큰집 할아버지도 끌려가 죽었음.- 보도연맹원들은 어서실에서 많이 사망했다고 들었고, 어떤 사람은 허리띠를 보고 시신을 수습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음.- 마을에서는 여름에 제사를 한 날에 지내는 집이 많았음.•한국전쟁 발발 직후 마을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할머니가 전주로 아버지 면회를 가는 건 불가능했고, 아버지는 행방불명되었음.•약 40년 전에 참고인의 남편이 ‘장인어른의 가묘라도 만들자.’라며 참고인을 데리고 전주에 가 보았음.- 당시 전주의 교도소도 가보고 사람들이 죽었다는 곳도 수소문하다가 우연히 옛 전주형무소의 형무관을 만났음.- 그 형무관은 한국전쟁 때 자신이 전주형무소 에서 형무관으로 있었다며 당시 전주형무소 에서는 죄수들을 세 차례에 걸쳐 내보냈다고 이야기해주었음.- 1차와 2차는 경범죄자들을 석방해주었고, 3 차로 나간 사람들은 수장되었다고 이야기해 주었음.- 아버지처럼 서울에서 재판을 받은 사람들은 3 차로 나가 죽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었음.•제적등본에 아버지는 ‘1968.1.26.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의 부재선고 … 장○섭 동년 2월 3 일 신고’라고 기재되어 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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